세계 반도체 메모리 산업을 선도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영진이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세미콘 타이완’ 행사에서 나란히 기조연설자로 등장해 자사의 기술력과 비전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양사는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해 상반된 전략과 관점을 보였다.

하이닉스, 고대역폭메모리 시장 선점 목표

SK하이닉스의 김주선 인공지능 인프라 사장은 “인공지능이 일반인공지능(AGI)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력 효율, 방열, 그리고 메모리 대역폭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자사의 기술력을 강조했다. 하이닉스는 올해 초 세계 최초로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8단 제품을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이번 달 말부터 12단 제품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김 사장은 특히 하이닉스가 대만 TSMC와의 협업을 통해 HBM 기술 개발과 시장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챗GPT 등장 이전까지 메모리 대역폭의 중요성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함께 대역폭 향상에 대한 요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6세대 HBM4 제품을 적시에 공급할 수 있도록 순조롭게 개발 중”이라고 덧붙이며, 향후 시장에서의 선두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삼성, HBM 기술을 넘어선 솔루션 필요성 강조

반면, 삼성전자의 이정배 메모리사업부 사장은 고대역폭메모리 기술만으로는 인공지능 시대의 요구를 모두 충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AI가 발전하면서 클라우드 기반 AI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온디바이스 AI 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라며 “HBM만 잘한다고 충분하지 않다. 대용량 스토리지와 온디바이스 솔루션을 포함한 다양한 제품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또한 “기존 메모리 공정만으로는 HBM 성능 향상에 한계가 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로직 기술과의 결합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보유한 시스템 LSI와 파운드리 역량이 이러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임을 언급하며, 종합 반도체 기업으로서의 강점을 부각시켰다.

협력과 기술 혁신을 향한 공통된 비전

삼성과 하이닉스는 모두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과제로 메모리 반도체의 전력 소비 증가, 저장 용량 부족, 그리고 병목 현상 해결을 꼽았다. 삼성전자는 “고성능, 저전력 제품 개발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객 및 파트너사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이는 대만 현지의 반도체 기업뿐만 아니라 행사에 참여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술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시사했다.

대만의 반도체 위상 변화

이번 ‘세미콘 타이완’에서 양사의 최고 경영진이 나란히 연설자로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를 중심으로 대만 반도체 산업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대만은 AI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삼성과 하이닉스 모두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각자의 전략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양사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 혁신과 협력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