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가입자가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아도 사전에 정해둔 방식으로 자동 투자되는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3월 1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이는 퇴직연금을 장기간 방치해두는 경우가 많았던 현실을 개선하고, 가입자들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정책적 조치다.

이 제도를 위해 정부는 2021년 말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개정했으며, 2023년 7월 12일부터 약 1년간 시범 운영을 거쳐 이번에 전면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퇴직연금은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 기업이 퇴직금을 대신 운용하는 확정급여형(DB)은 디폴트옵션 적용 대상이 아니며, 근로자가 스스로 운용을 선택하는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은 디폴트옵션을 반드시 설정해야 한다. 특히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이 적용된 기업에서 디폴트옵션을 도입하지 않으면 법적 시정명령과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반면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의 경우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설정을 하지 않으면 금융사로부터 계속 안내를 받게 되며, 수익률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

금융회사들은 투자 위험도에 따라 총 7~10개의 운용 포트폴리오를 제공한다. 가입자는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으로 구분된 투자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은행은 초저위험형으로 정기예금 100%, 저위험형으로 정기예금 70%와 펀드 30%, 중위험형은 정기예금 30%와 펀드 70%, 고위험형은 펀드 100%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안내하고 있다.

이미 퇴직연금을 운용하고 있는 가입자라 하더라도 디폴트옵션을 선택했다고 해서 바로 해당 방식으로 자산이 운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후 6주 동안 별도의 운용 지시가 없을 경우에만 선택한 옵션에 따라 자동 운용이 시작된다. 또 원하는 경우 언제든지 선택한 옵션을 변경할 수 있으며, 자산 일부에만 디폴트옵션을 적용하고 나머지는 다른 방식으로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재 고용노동부로부터 디폴트옵션 상품을 승인받은 퇴직연금 사업자는 총 41곳이며, 이들이 제공하는 상품은 135개에 이른다. 다양한 상품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된다면,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디폴트옵션 비교공시’를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자료에는 원금 보장 여부, 상품 유형, 수익률, 수수료, 적립금 규모 등 핵심 정보가 정리돼 있어 비교가 용이하다.

제도 도입 초기인 만큼 현재는 안전한 투자 옵션을 선택하는 가입자가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한 은행에 퇴직연금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직장인 남모(30)씨는 “은행에서 디폴트옵션을 선택하라는 전화를 받고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위험도가 낮은 상품을 골랐다”며 “사실 큰 관심은 없지만, 안전하게 굴러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고 전했다.

고용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3월 말까지 디폴트옵션이 적용된 퇴직연금 적립금은 총 3013억 원이며, 이 가운데 84.43%인 2544억 원이 정기예금 등 초저위험 상품에 투자됐다. 같은 기간 수익률은 초저위험이 1.11%, 저위험이 2.33%, 중위험이 3.22%, 고위험이 4.81%로 나타났으며, 위험 수준이 높을수록 수익률도 높게 형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이번 제도가 퇴직연금의 방치 문제를 해소하고, 국민의 안정적인 노후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도 디폴트옵션의 도입 상황과 투자 결과에 대한 주기적인 점검이 이뤄질 전망이다.